남북전쟁에 참전한 유일한 아시아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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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에 참전한 유일한 아시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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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에 참전한, 유일한 아시아인 우홍넉(1834~1919). 중국 장저우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가 지구 반대편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참전하게 된 사연은 꽤 흥미롭다.그는 1834년8월7일에 장저우근교의 안토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농장에서 수확한 것을 팔기 위해 상하이에 자주가곤 했었는데,

미국인 주교 윌리엄 본이 상하이에 미션스쿨을 연다는 얘기를 듣고 아들을 그곳에 입학시킨다.그곳에서 세례도 받고 졸업후에는 그 미션스쿨에서 일을 했었는데 1854년 일본에 개항을 요구한 후 미국으로 귀환 중이던, 페리 제독의 함대가 상하이에 기항하였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는 평소에 미국에 가보는게 꿈이었기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상하이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미국인 장교들에게 자신을 미국에 가는 길에 태워달라고 교섭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교섭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그는 배에 타는 조건으로 함대 선의(船醫)인 존 메서스미스 박사의 시중을 드는 일을 하게 된다.1855년3월 필라델피아 선착장에 도착한 우홍넉은 팬실베니아주 랭커스터에 있는 매서스미스 박사의 집에 머물었다.거기서 성 제임스 감독교회의 일을 하며 9년간 랭커스터에서 살게 된다 1860년9월22일엔 아시아인으로서는 드물게 미국시민권을 얻는데도 성공한다.그러던 중 남북전쟁이 터졌고 로버트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이 펜실베니아를 침공하자, 

펜실베니아 주에서는 젊은 남성 5만명에게 자원병 요청을 하였다.당시엔 주마다 민병대가 있었고 유사시에 주지사가 자원병들을 끌어모아 전쟁에 투입하곤 하였다.그는 이 요청에 응해 1863년6월29일 펜실베니아 자원 긴급민병대 보병50연대 1중대에 입대했다. 

그는 남북전쟁 통틀어서 유일한 아시아인 병사였다.북군의 흑인병사들도 포로로 잡으면 모조리 처형하던 남군이 아시아인 병사를 잡으면 어떻게 하였을까?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남군은 곧 저지되었고 그가 속한 1중대는 남북전쟁 내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1863년 8월 15일 민병대가 해산할때까지 훈련을 하며 따분한 군대생활을 이어갔다군대를 제대한 후, 우홍넉은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인 청나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미국엔 아시아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매우 차별이 심했고, 

더군다나 폐쇄적인 군대에서는 그 차별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터..그가 청나라로 돌아간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미국에 귀화한 중국인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다고 그러면 "산업스파이 아니냐?"는 눈으로 쳐다보겠지만...결국 1864년 2월 9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그는 중국 상하이로 돌아왔다.거기서 3년 뒤인 1867년 5월1일 주교가 되었고, 

1919년 8월 18일 사망할때까지 상하이에 계속 머물며 가난한 이들을 도왔고 성직자로서의 본분을 다하였다.이 이야기는 한 젊은 중국 청년이 우여곡절 끝에 지구반대편의 전쟁에 참전하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온 해피엔딩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미국을 동경했던 젊은이가 인종차별의 벽으로 인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점에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