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자이언츠 레전드 임수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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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레전드 임수혁

롯데 자이언츠 레전드 임수혁


진정한 거인 임수혁


한 명의 선수가 있었습니다.


당당한 체구와 수준급의 타격 실력, 그리고 작전수행능력도 좋았습니다. 게다가 마음 씀씀이도 넉넉해 그가 속한 팀에서는 웬만해서는 불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선수의 포지션은 포수였습니다.


야구에서 가장 힘든 포지션인 포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강타자였습니다.


프로무대에 입문했습니다.


그는 팀의 타선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마다 홈런과 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어느날 그가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그가 쓰러진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에게 필요한 조치를 해 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응급치료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습니다.


이렇게 한 팀을 이끌어갈 거목이 쓰러졌습니다.


10여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가 쓰러진지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변한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임수혁. 부산을 대표하는 또다른 강타자이자 팬들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는 선수.


어떻게 이 선수를 서술해야 할 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수박 겉핥기나마 조금 써보겠습니다.


임수혁. 1969년 6월 17일생. 출신 학교는 방배초등학교, 강남중학교, 서울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방배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무렵, 처음으로 임수혁은 야구부 가입 권유를 받게 되었고 그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구부에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실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시절부터 기량이 일취월장하더니 고등학교 졸업무렵에는 전국을 주름잡는 강타자로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중학교때, 임수혁과 함께 배터리를 이루었던 선수는 이상훈이었고 중학교때부터 시작된 이 두 선수의 인연은 끝까지 가게 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무대에 입단하는 대신 선택한 대학 진학. 임수혁은 고려대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이 당시, 고려대는 포스트 최동원이라고 불리는 박동희가 홀로 마운드를 이끌었던 팀이었습니다. - 덕분에 고려대는 고려고등학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


그리고 대학 1년차였던 1988년, 봄. 임수혁은 대학봄철리그 결승전에 대타로 나서 천금같은 2타점 2루타를 때리는 활약을 펼칩니다.


이 후, 임수혁은 박동희와 함께 대학을 평정하는 전설적인 배터리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그리고 국가대표로서 활약하였고 대학 시절, 선수단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리더로서도 훌륭한 활약을 보였습니다.


1992년, 프로 신인지명무대에 선 임수혁. 그는 2차지명에서 LG트윈스의 지명을 받지만 먼저 군대에 입대하게 됩니다.


2년 후, 1994년, 임수혁은 다시 신인지명무대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롯데자이언츠의 지명을 받고 프로무대에서 뛰게 됩니다.


이 때, 임수혁은 강한 어깨와 장타력을 겸비한 대형포수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994 임수혁 : 29경기 출장, 타율 0.250, 출루율 0.375, 장타율 0.275, 48타석 40타수, 10안타, 0홈런, 7타점, 0도루


1995년, 임수혁은 롯데의 주전포수로 입지를 굳히게 됩니다. 그리고 15개의 홈런을 때려내면서 18개의 홈런을 때린 마해영과 함께 "마림포" 로 불리며 롯데의 중심타선에서도 크게 활약합니다.


이 해에 롯데가 기록한 팀 홈런의 수는 65개. 소총부대, 똑딱이 타선등으로 불리던 롯데의 타선속에서 임수혁은 무시못할 장타력을 보여주며 상대 투수들에게 쓴맛을 보여주었습니다.


1995 임수혁 : 104경기 출장, 타율 0.247, 출루율 0.310, 장타율 0.461, OPS : 0.771, 300타석 271타수, 67안타, 2루타 9개, 3루타 2개, 15홈런, 68타점, 34득점, 24볼넷, 몸에 맞는 공 2개, 고의사구 1개, 2도루


홈런 11위, 타점 8위


롯데자이언츠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그리고 LG트윈스를 4 : 2로 물리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합니다.


임수혁은 6경기에 출장, 타율은 0.250, 3안타에 그쳤지만 그 안타중에 2개를 홈런으로 기록했고 3타점을 기록했습니다. - 타율 0.250, 출루율 0.438, 장타율 0.750, OPS : 1.188, 3안타, 2홈런, 3타점, 3득점 -


한국시리즈에서 롯데는 OB와 7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치렀지만 아쉽게 3 : 4로 패배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했습니다.


임수혁은 4경기에 출장해 타율 0.286, 출루율 0.333, 장타율 0.286, OPS : 0.619, 2안타, 1타점을 기록합니다.


(이 한국시리즈에서 임수혁이 기록한 1타점은 롯데자이언츠가 5차전에서 OB베어즈를 이기게 했습니다.)


1996년, 작년에 15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프로무대에서 타격감을 익힌 임수혁은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합니다.


3할을 기록하며 정교한 타격솜씨를 보여주었고 홈런 역시 11개를 때려내며 장타력도 죽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1996 임수혁 : 113경기 출장, 타율 0.311, 출루율 0.385, 장타율 0.438, OPS : 0.843, 431타석 373타수, 116안타, 2루타 18개, 3루타 2개, 11홈런, 76타점, 43득점, 46볼넷, 몸에 맞는 공 3개, 고의사구 6개, 4도루


타율 5위, 출루율 7위, 장타율 9위, OPS 8위, 최다 타석 26위, 최다 타수 24위, 최다 안타 13위, 최다 2루타 25위, 홈런 17위, 타점 3위, 볼넷 15위, 고의사구 9위


그러나 1997년, 임수혁은 고질적이었던 무릎 부상으로 인해 한 해를 쉬다시피 합니다.


1997 임수혁 : 49경기 출장, 타율 0.248, 출루율 0.368, 장타율 0.407, 176타석 145타수, 36안타, 6홈런, 25타점, 1도루


하지만 1998년, 그는 다시 돌아와 마스크를 쓰고 롯데의 내야를 진두지휘하게 됩니다.


1998 임수혁 : 110경기 출장, 타율 0.247, 출루율 0.327, 장타율 0.384, 378타석 336타수, 83안타, 9홈런, 55타점, 0도루


1999년에는 주전보다는 백업으로 출장을 했습니다.


1999 임수혁 : 73경기 출장, 타율 0.250, 출루율 0.310, 장타율 0.402, 126타석 112타수, 28안타, 3홈런, 19타점, 0도루


1999년, 롯데는 몇년간의 부진을 완벽히 떨쳐내고 살인타선과 수준급 마운드를 완성하여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상대는 삼성라이온즈.


김민재 선수, 박정태 선수에 관한 글을 썼을때도 언급했지만 롯데는 4차전까지 1 : 3으로 내몰리며 플레이오프 탈락의 위기에 처해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5차전, 호세의 역전 끝내기 3점 홈런, 그리고 6차전 박석진의 7이닝 퍼펙트 투구에 힘입어 롯데는 승부를 원점으로 맞추었고 결국 승부는 7차전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김민재 선수, 박정태 선수편에서 7차전을 어느정도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약간 간략하게 경기를 언급하겠습니다.


4회말, 이승엽과 김기태의 홈런 - 롯데 0 : 2 삼성


6회초, 호세의 솔로 홈런 - 롯데 1 : 2 삼성. 그러나 홈런을 치고 홈으로 들어오는 호세에게 오물이 투척되었고 분노한 호세가 관중석에 방망이를 집어던지는 행동을 하면서 퇴장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20여분간의 경기 중단. 하지만 롯데 선수단은 경기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고 - 박정태 선수는 이 때, 그 명언을 하게 됩니다. - 이어진 타자 마해영의 동점 홈런 - 롯데 2 : 2 삼성.


7회초, 김응국의 역전타 - 롯데 3 : 2 삼성.


8회말, 김종훈과 이승엽의 홈런 - 롯데 3 : 5 삼성.


경기는 9회초로 접어들었습니다.


롯데의 선두타자 공필성이 좌전안타를 치며 반격의 불씨를 만든 상황. 하지만 임재철이 우익수 플라이로 아웃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2번 더 아웃을 당한다면 경기는 이대로 삼성의 승리로 종료되는 상황.


임재철에 이어 다음타자로는 원래 강성우가 들어서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김명성 감독은 대타를 기용합니다. 그리고 그 타자는 다름아닌 임수혁. - 김명성 감독은 작고하기 전, "홈런을 기대하고 임수혁을 대타로 냈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게 아니라 임수혁을 우연히 보는 순간, 임수혁이 눈으로 '제가 아니면 안됩니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을 읽었기 때문에 대타로 기용했을 뿐" 이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


그 전까지는 별 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임수혁이었지만......


임수혁은 임창용의 2번째 공을 별 힘 안들이고 밀어쳤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구구장 우측 관중석 상단에 떨어지는 대형 홈런.


이 홈런 한방에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롯데쪽에게 넘어갔고 이 기세를 탄 롯데는 10회말, 1사 만루의 위기상황에서 등장한 주형광의 호투, 그리고 김민재의 그림같은 호수비로 승부를 11회로 끌고가게 됩니다.


11회초, 임재철이 3 - 유간을 꿰뚫는 안타로 출루한 상황. 다음타자였던 임수혁은 강공대신 희생번트를 댔고 깔끔하게 작전을 성공시킵니다.


그리고 10회말 호수비의 주인공인 김민재가 적시타를 때려냈고 주형광이 11회말, 삼성의 반격을 3연속 삼진으로 봉쇄하면서 롯데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됩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지친 나머지 끈질긴 승부를 펼치기는 했으나 1 : 4로 한화이글스에게 패배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합니다.


임수혁은 5경기에 출장했지만 5타석 무안타를 기록합니다.


2000년.


임수혁은 전지훈련기간동안 고된 훈련을 견디고 또한 누구보다도 더 많이 훈련을 했습니다.


그리고 프로야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임수혁은 10경기에 출장하며 타율 0.263, 출루율 0.300, 그리고 장타율 0.789, OPS : 1.089, 20타석 19타수, 5안타, 2루타 1개, 3홈런, 7타점, 3득점이라는 무시무시한 불방망이를 휘둘렀습니다.


4월 18일.


잠실에서 벌어진 롯데자이언츠와 LG트윈스의 경기.


2회초, 임수혁은 LG의 유격수 유지현의 실책으로 출루합니다. 그리고 후속타자 우드의 안타로 2루에 안착하게 됩니다.


조성환의 타석.


여느때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저 2루에 있던 임수혁은 리드를 취하면서 조성환의 안타가 터질 경우, 홈까지 내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임수혁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지니고 있었던 지병인 심장 부정맥. 그 날, 갑자기 심장이 느리게 뛰면서 뇌에 공급되어야 할 산소가 부족해 의식을 잃고 만 것입니다.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1루 주자인 용병 우드. 그리고 곧이어 구단 트레이너가 달려왔지만.......


드넓은 잠실구장에서 심폐소생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저 들것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탈진한 사람에게 하는 응급조치만을 할 뿐이었습니다.


(간호사가 있기는 했지만 웬만한 상황에서 그라운드내에 들어오는 것은 금지였습니다.)


결국, 몇십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강남 시립병원에서 맥박과 호흡이 살아나기는 했지만 임수혁의 의식은 돌아오지 못했고 식물인간으로.......


(이 후, 10년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생략하겠습니다. 임수혁 선수에 관한 자료를 보다보니 화가 나서........ 쌍시옷이 나오려고 합니다.)


의사들은 임수혁 선수가 1년을 못 넘길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4년을 넘게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그러자 5년은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임수혁은 그 예상을 뒤엎었습니다.


무려 10년간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2010년 2월 7일, 결국 임수혁은 박동희가 기다리고 있는 천국의 그라운드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드넓은 잠실구장에 의사 한 명만 대기하고 있었어도...... 그리고 심폐소생술만 한 번 해주었어도....... 우리는 한 명의 거인을 이렇게 떠나보내지 않았어도 되었습니다.


임수혁이 쓰러지고 롯데는 기나긴 암흑기를 겪었고 부산의 야구팬들은 임수혁만 돌아왔어도를 수없이 외쳤습니다.


임수혁이란 선수는 단순한 포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라운드에서 뛰었던 기간은 7년에 불과했지만 그는 그 기간동안 그라운드의 거인으로 우리들의 기억속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임수혁이 쓰러진지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야구장에서 뛰는 선수들은 부상의 위험을 안고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습니다.


그나마 현재는 야구장에 의사들이 대기하고 있다지만 그것도 KBO가 자발적으로 한 일이 아니라 선수협의회에서 KBO에 수차례 건의한 끝에 간신히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돔구장의 건립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보고 응원하는 선수들이 오랫동안 건강하고 안전하게 활약하며 우리들의 기억속에 남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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