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같았던 KBO투수들
성적은 나무위키 펌
1. 윤학길
10년 가까운 커리를 두고 봤을 때 한국야구 최고의 이닝이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프로야구 최초이자 유일한 100완투 달성자이기도 합니다. 30승보다 더 깨기 어려운 기록이 아닐지?
2. 김시진
1983년~1987년 5년 동안 1100 이닝 넘게 던졌습니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1984년, 1985년과 1987년 모두 2% 아쉽게 되었습니다.
21.최동원
1984년은..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3. 장명부
30승, 36완투, 5완봉, 427이닝...그리고 은근히 많이 잊혀지는 6세이브. 그놈의 1억만 아니었으면 롱런할 수 있었던 투수였을 텐데 이후 성적이 수직하락 해버립니다.
4. 윤석환
5. 구대성
이후로도 일본 시절이 끝날 때까지 매년 세자릿 수 이닝을 먹었습니다.이런 성적과 무리를 하고도 롱런한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특히 특유의 투구폼을 생각하면 무릎이나 허리에 부하가 심하게 걸렸을 것 같은데 말이죠.
6. 김현욱
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는 분명 선발이 강력한 팀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 선수에게 몰빵시키는 전략을 세웠고 결국 20승이라는 압도적 성적을 기록합니다.
7. 전병두
2009년 8승 8세이브 방어율 2위를 차지
8. 고효준
고효준은 2009년 시점에서 프로 8년차였습니다. 2009~2011년 동안 선발 중간 마무리를 겸업하며 불펜투수로 300이닝 - 25승을 올리는데 성공합니다.
9.장문석
선발 중간 마무리를 겸업했던 선수였습니다. 특히 커리어하이였던 2002년은 엘지 팬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됩니다. 2002년 엘지 트윈스의 선발은 부실했었고 장문석의 활약으로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습니다. 이후 기아로 트레이드되었으나 4점대 15세이브로 부진, 커리어를 마감하게 됩니다.
10. 염종석
92년 선발 마무리(6세이브)를 떠맡았던 염종석은 가공할만한 성적을 내고 팀을 우승시켜 버립다. 그 영향인지 이듬해인 93년 성적이 수직하강해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선발 마무리를 겸업하며 계속 무리를 했고 그 이후 전성기 기량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11. 송유석
연습생 배팅볼 투수로 해태에 입단한 선수였습니다. 91년부터 드디어 선발 중간 마무리를 오가며 전천후 투수로 활동했습니다.
12. 노장진
2002년 노장진은 마무리보직을 맡게 됩니다. 63경기 127이닝...마무리였습니다. 11승 23세이브라는 훌륭한 성적을 올렸으나 혹사 탓인지 다음 해 10패를 찍었습니다. 2004년 롯데로 트레이드 되었으며 잠시동안 솔리드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삼성시절보다는 2005년 롯데에서의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13. 임창용
90년대 후반 중무리의 상징이었습니다. 2010년대 투수는 경험조차 하기힘든 대혹사...이렇게 던지고도 일본가서 부활하고 40살 넘게 뛰었습니다. 선수의 내구도는 유연성에서 나오는 게 맞나 봅니다.
14. 송진우
젊은시절 선발, 불펜, 마무리까지 돌려졌습니다. 만능 스윙맨 에이스로 빙그레는 91년대 초 전성기를 맞았으나 안타깝게도 해태 벽을 넘지못해 우승을 차지하진 못했습니다. 송진우 선수는 1999년이 되어서야 우승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15. 김성길
1989년 풀타임 선발로 233이닝을 던지며 80년대 후반 삼성 암흑기의 에이스 역할을 했었습니다. 1991년, 그는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16승-18세이브를 기록합니다. 이때 나이가 36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