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재수복 후 전선을 39도선으로 올리자고 지속적으로 제안한 미군 수뇌부

군사무기(밀리터리) 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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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재수복 후 전선을 39도선으로 올리자고 지속적으로 제안한 미군 수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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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하반기에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순식간에 38선 이남까지 밀렸고

1951년 1월 4일에는 수도 서울까지 공산군에게 내줬다가 두 달후인 3월 15일에 서울을 재수복했다.

동시에 중공군을 다시 38선 일대까지 밀어붙이는 성과를 이룩했다.

 

서울이 재수복되고 바로 다음 날, 미국에서 국무부와 합찹본부 사이에 합동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참석한 군 수뇌부들은 현 방어선이 자리한 지점은 천연방어물이 부족하여 전략적으로 취약점이 많다

역설했으며 이왕 이 기세를 몰아 현 위치보다 더 좋은 전략적 강점을 지닌 평양-원산을 잇는 방어선까지 진격하자

주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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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회의에는 5명의 고위인사들이 참석했는데 이들의 발언 내용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회의록 원문은 미 국무부 산하의 "Office of the Historian" 문서철에 포함되어 있으며 (링크는 하단 참조)

전체적인 번역은 남시옥 교수의 논문을 따르되 이해를 돕기 위해 몇몇 대목은 의역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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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에 참석한 장성 중 한 명인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콜린스(육군참모총장): 우리는 기존 회의에서 다뤘던 현 한국의 문제에 대해 다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중공군들이 세련되었다면 38선으로 후퇴할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중공군은 이제 싸울 기력을 잃었고 손실을 메꾸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브래들리(합참의장):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은 정치적 문제이지 군사적 문제가 아니다.

 

콜린스: 정치적 결정일지라도 한국에서 우리가 어디까지 진격할 수 있을지 군에 여쭤봐야 한다.

 

니츠(국무부 기획국장): 만약 우리의 정치적 결정이 6월 25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 그리고 그것이 군사행동방침에 적절한 정치적 목적이라면 - 조속히 (중공군과) 정전협상을 시작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에 당면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38선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관련된 정치, 군사적 결정을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

 

콜린스: 우리는 수요일(3월 21일) 이전에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성에 당면할 지도 모른다. 우리가 춘천을 빼앗는다면 중공군은 갈 곳이 없다. 우리는 탄력을 살려 별다른 전투 없이도 상당한 거리까지 북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리지웨이 장군에게 지시할 방침을 결정해야 한다.

 

셔먼(해군참모총장): 우리는 38선 이북 지역에 있는 여러 거점의 전략적 장점을 취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평양 탈환을 선호한다. 우리가 평양을 얻으면 휴전협상에 유리하며 우리는 그럴 준비가 되어있다.

 

콜린스: 만약 우리가 그 정도까지 멀리 진격한다면 아마도 한반도의 (가장 잘록한) 허리부위까지 가야 할 것이다. 그 지역은 아주 좋은 방어 거점이며 또한 우리는 (남한 이외의) 쌀 생산지도 추가로 확보하게 된다. 동해안의 원산에서부터 서해안까지 이어지는 방어선은 (적군을 방어하기) 가장 바람직한 산악지형을 거치기 때문에 좋은 방어선이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 인구의 약 90%을 확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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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덴버그(공군참모총장): 만약 미군이 평양 부근까지 올라간다면 중공군은 본국과 통신선이 가까워지기 때문에 우리 공군이 효과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기가 두 배 어려워져 곤란을 겪을 것이다.

 

니츠: 본인이 지금까지 이해하기로는 한강 이남의 방어선이 가장 지키기 좋은 잠재성을 지녔다고 보는데 중공군의 통신선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중공군이 우리 부대와 교전을 회피하고 철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우리가 베이징까지 진격하지 않는 한 우리가 설정한 어떤 방어선 너머로도 철수할 수 있다.

 

콜린스: 우리가 한강 서남방의 진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원산에서 시작되는 방어선을 만들려고 하는데, 지금까지 시도해 볼 기회가 없었다. 설사 공군에게는 불리할지라도 우리가 적절하게 방어선을 구축한다면 중공군이 돌파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중공군이 우리 진지를 기습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불바다를 만들어 그 떼거리들에게 혼을 내 줄 수 있을 것이다.

 

셔먼: 우리가 38선 이북의 방어선을 고려해야 한다면 중공 측과 다롄항의 관계와 같은 다른 대안을 검토할 것을 건의하고 싶다.

 

이 날 회의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당시 미 국무부는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추고 38선 인근 지대를 유지하면서

본격적으로 공산군과 휴전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쪽이었던 반면 국방부와 합참은 적어도 '한반도의 허리'라고 불리는

39도선까지는 진격하여 그곳에서 방어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이들의 쟁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미 국방부ꞏ합참:

 

1) 평양-원산선은 한반도에서 동서 폭이 가장 짧은 곳이고 적당한 산악지형도 존재해서

일단 확보해 두면 방어에 매우 용이하다. 평양에 위치한 평야지대의 경우 대동강을 이용하면 된다.

 

2) 평양을 확보한다면 한반도 인구의 약 90%를 남한 쪽으로 흡수할 수 있으며 북한 지역에 위치한

대부분의 곡창지대도 차지할 수 있게 되어 향후 북한의 인구생산능력을 크게 저하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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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부:

 

1) 39도선까지 진격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의 희생이 더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2) 설령 북진한다 해도 중공군은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며 이럴 경우 장기전의 늪에 빠지게 되고

최악의 경우 소련이 참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 계속 한반도 내 전쟁에 발이 묶이게 되면 향후 제3차 대전의 주 전장이 될 유럽의 방비가 너무 약해지는 문제가 생긴다.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쟁이 장기화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고 설상가상 중공군이

미군을 상대로 수세적으로 나오지 않고 지속적으로 공세를 펼치자 이러한 우려는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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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최종적으로 미국 정부는 국무부 안을 승인했으며 몇 달후인 1951년 7월 10일에는 미 합참이

현 방어선을 계속 확장시키되 가능한 한 38선 인근에서 국한시켜야 한다는 지령을 UN군에

하달했다. 그리고 이 날을 기점으로 한국의 북진통일 계획은 사실상 좌절되었다.

 

-- <끝> --

https://www.fmkorea.com/best/6048632656

 

참고자료: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1v07p1/d163

남정옥, '미국은 왜 한국전쟁에서 휴전할 수밖에 없었을까', 한국학술정보, 2010.

남시옥, '딘 애치슨과 미국의 한반도 정책 - 한국전쟁 시기를 중심으로 -', 2015

https://blog.naver.com/minjune98/22277376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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